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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에 관한법

핵 이원화 정책

핵 이용의 양면성

이른바 핵시대는 1945년 미국이 일본 나가사키 및 히로시마의 두 도시에 핵폭탄을 투하함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핵시대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평화적 핵에너지의 광범위한 보급을 통해 한정된 지구자원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롭고 깨끗한 에너지의 대안을 제시하는 반면, 강대국에 의한 핵무기 경쟁과 핵확산 위협을 통해 세계를 파멸 직전의 위태로운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적 핵에너지와 핵무기, 어느 경우에든 핵에 의해 발생하는 환경오염은 인류 전체의 건강 및 생명, 나아가서는 지구 자체의 존립을 위협할 만큼 그 피해가 크다. 따라서 핵의 이용 문제에 대한 논란이 국제사회에서 끊이질 않고 있다. 핵은 그의 선택 내지 보유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국가와 지역에 방사능 오염 가능성과 그로 인한 장기적인 위험을 가져오며, 일단 피해가 발생하는 경우 인체와 지구환경에 극도로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핵이용이 지니는 양면성 때문에 핵과 관련한 국제정책은 평화적 핵에너지와 핵무기에 대해 각각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국제 핵정책은 이원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평화적 핵에너지에 대해서는 인류에 평화, 건강 및 번영을 안겨주는 존재로 파악하여 국제협력을 통해 전세계에 보급하도록 추진하고, 핵무기에 대해서는 인류에 파멸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위험인자로 파악하여 그 확산을 최대한 억제한다는 것이다.

평화적 핵에너지 정책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과 구소련 양국이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한 직후인 1953년 미국정부는 핵의 평화적 이용에 찬성하는 모든 국가들에게 민간 핵발전소를 보급할 것을 공표하였다. 이러한 뜻은 1953년 12월 8일 제 8차 유엔총회에서 아이젠하워의 연설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그 당시 미국정부는 핵에너지를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에 따라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핵지식과 기술을 전세계에 보급하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전후의 냉전시대에 "평화적 이용"에 국한한다는 조건을 달아 개발도상국들에게 핵을 보급하는 것이 일종의 선전전략 내지 상업적 이익추구의 성격을 띄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당시 국제사회에는 핵확산에 의한 위험발생이라는 측면보다는 핵이익의 공유라는 측면이 더 강조되는 이른바 낙관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이같은 낙관주의적 사고가 가능했던 것은 핵연료 사이클에 관한 국제사회의 통제 및 감시능력을 과대평가하고, 동시에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에 따르는 안전성문제와 민간 핵발전소에서 발생하는 핵물질의 핵무기 전용 가능성을 과소평가한 데에 기인한다.

그 당시에는 미국과 구소련이 시험단계의 원자력 발전소를 포함한 원자력 발전소를 3개 정도 보유하고, 소수의 선진국들이 연구용 원자로를 가동 내지 설치하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정부는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통해 각 국가의 핵연료 사이클을 철저히 통제하고 감시하여 평화적 핵에너지의 핵무기 전용을 막는 한편, 각국 정부와 국제원자력기구와의 국제협력을 통해 안전성을 확보함으로써 핵에너지의 민간 이용을 세계적으로 보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 당시 핵관련 지식으로서는 민간 핵발전소의 운전 중에 발생하는 핵물질, 즉 원자로 플루토늄이 원자폭탄의 제조원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핵에너지 확산계획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이같은 태도는 핵에너지를 국제사회에 대량 보급하는 데 크게 일조를 하였으며, 이는 1957년에 국제원자력기구를 창설하여 원자력확산을 장려하고 촉진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평화적 핵에너지의 보급에 대한 낙관적 입장은 핵이용의 초기단계에서부터 핵에너지의 안전문제에 대한 국제적 규제를 소홀히 함으로써 1980년대에 이르러 대형 재난사고를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핵무기 정책

평화적 핵에너지의 경우와 달리 핵무기에 관한 국제 핵정책은 비교적 일찍부터 통제와 비확산을 원칙으로 삼아왔다. 이 원칙은 원자력이 평화적인 목적만을 위해 이용되어야 한다는 기본정신 위에 바탕을 두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의 5대 상임이사국인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의 핵무기 보유를 전제로 하고 그 밖의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통제와 비확산을 요구하는 차별적인 핵정책에 기초하고 있다.

이같은 원칙이 핵무기 분야에서 처음부터 확립된 것은 아니었다. 핵개발 초기에는 국제사회에서 핵무기나 핵실험에 대한 반대의견이 거의 표면화되지 않았고 미국과 구소련 등 소수의 핵개발 당사국들도 핵개발 통제의 당위성에 대해 아무런 인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서방세계에서는 그 당시 구축된 냉전체제의 논리에 따라 "자유세계의 방어와 안보에 대한 책임"을 들어 핵실험을 두둔하는 경향이 우세하기까지 했다. 핵실험이 인도주의와 국제법에 위배된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도 있었지만 더 많은 학자들은 이 실험이 자유세계를 방어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정당화하였다. 각 국가는 자유세계의 이해관계를 조화시키고 '합리성 기준(criteria of reasonableness)'을 지키는 범위 내에서 핵실험을 실시하고 핵무기를 개발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핵실험에 반대하는 경우에도 그것이 항해와 어업의 이용을 방해한다는 이유에서 도덕적인 비난가능성을 논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를 국제법 내지 해양법과 관련하여 규제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국제법원 역시 핵실험국가에 대해 핵실험 중지의무를 부과하거나 핵실험으로 인한 환경오염 피해에 대해 국제책임을 지도록 판결한 바가 없었다.

1954년 3월과 4월에 미국이 Pacific Proving Grounds에서 실시한 첫번째 수소폭탄실험으로 일본어선이 피해를 입은 사건을 두 나라가 처리한 과정을 보면 그 당시의 국제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일본정부는 태평양상에서 자국 어선이 포획한 참치를 전량 몰수하고 이에 대한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등 미국에 강력하게 항의하였지만 핵실험의 중지까지 요청하지는 않았으며, 이에 대해 미국정부는 핵실험에 의한 "법적 책임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단지 2백만불의 피해보상을 하는 선에서 이 사건을 매듭지었다.

그 당시 국제법상 핵실험 중지의무의 존재나 그에 대한 인식이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의 경우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으로 인해 자국 어선의 어업활동이 피해를 입은 것이 명백한 사안에 대해서도 미국정부에 금전적인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데 그쳤으며, 미국정부는 피해보상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핵실험에 따른 자국정부의 국제책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핵시대 초기에 국제사회 대부분의 국가들은 핵실험과 핵무기의 불법성이나 그로 인한 방사능의 환경오염 가능성에 대해 별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심지어 핵실험이 주로 실시되었던 태평양상의 국가들도 처음에는 아무런 반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대국들이 경쟁적으로 핵실험을 거듭하고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자 핵전쟁으로 인한 인류 전체의 파멸가능성이 국제사회에 비로소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핵무기의 확산을 억제하려는 움직임이 국제사회에 나타나게 된 것은 이러한 인식의 확산과 관련이 있다.

1961년 유엔총회는 핵무기의 이용이 유엔헌장과 국제법 위반을 구성한다는 것을 선언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유엔총회의 결의안이 법적 구속력을 갖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으나, 현재로서는 결의안이 법적 구속력을 갖지 않으며 단지 관습법 형성의 중요한 선례가 된다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따라서 유엔총회의 결의안은 그 자체로써 국제사회를 강제하는 효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결의안이 법적 정치적으로 국제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유엔총회가 이를 통해 핵무기의 불법성을 지적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핵개발 강대국들에게 커다란 타격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미국은 유엔에 강력하게 반발하여 결의안 통과에 반대투표를 하였고, 핵무기가 국제법 위반이라는 법적 관점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자국의 핵실험과 핵무기 개발행위는 자유세계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 그 중요성은 다른 국가들의 관습적인 해양이용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에 합리적이고 합법적이며 따라서 국제법과 국제관행에 일치된다는 것이 미국측의 논리였다.

미국의 반대와 상관없이 통과된 유엔총회 결의안은 2년후인 1963년 부분적 핵실험 금지조약의 체결로 이어지게 된다. 이 조약은 대기, 우주, 바다, 남극 등 일정지역에서 핵실험과 핵폭발을 금지시킨 최초의 조약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나 핵무기 확산을 규제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핵무기의 확산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체결된 것은 1968년의 핵무기 확산금지조약이다. 이 조약의 체결이 가능했던 것은 핵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인류 전체가 멸망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국제사회에 팽배해졌기 때문이다. 이 조약은 체결 당시 핵을 보유하던 5개 강대국만을 핵무기 국가(nuclear-weapon states)로 보고 그 이외의 국가들은 모두 비핵무기 국가(non-nuclear-weapon states)로 취급하는 근본적인 차별 위에 기초하고 있다.

비핵무기 국가에 대해서 핵무기 내지 핵폭발장치의 제조 내지 획득을 금지하고 평화적 핵에너지의 핵무기 전용을 엄격히 통제, 지도, 검색하는 반면 기존 핵무기 국가에 대해서는 보유 핵무기의 감축 내지 제거에 관한 의무가 설정되어 있지 않으며, 실제로도 이 조약은 기존 핵국가의 핵무기 감소에 기여한 바가 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조약은 소수 강대국에 의한 핵무기 독점과 대다수 국가에 대한 핵무기 확산금지를 명문화하고 있는 것이다.

핵무기 국가 및 비핵무기 국가간의 불평등성에 기초한 이 조약의 기본구도는 일부 비핵무기 국가들의 강력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30여년간 계속되어 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조약은 국제사회에서 핵무기가 확산되는 것을 억제하는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국제원자력기구의 핵확산 통제정책을 강화시켜 왔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핵 이원화 정책의 문제점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국제 핵 정책은 평화적 핵에너지와 핵무기에 대해 확산과 비확산이라는 각기 상반된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원화 정책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로, 핵 이원화 정책은 평화적 핵에너지와 핵무기를 완전하게 분리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평화적 핵에너지와 핵무기는 핵연료의 이용 방법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전혀 별개의 것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핵연료의 이용을 서서히 늦추는 경우에는 평화적 핵에너지가 되는 것이고, 반대로 이용을 빠르게 해서 에너지를 단번에 분출시키는 경우에는 핵무기가 되는 것이다.

더욱이 평화적 핵에너지는 핵무기 개발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것이고, 실제로 핵강대국들에서도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과 군사적 이용이 완전하게 분리되지는 않고 있다. 또한 1950년대 초반에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던 원자로의 플루토늄 핵폭탄 전용도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가능하다는 것이 실증되고 있다.

실제로 지난 1974년에 인도는 상업용 원자로에서 추출된 사용후연료를 재처리하여 만들어진 플루토늄으로 핵무기 실험을 하는 데 성공하였다. 따라서 평화적 핵에너지와 핵무기를 별개의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과거 미국이 갖고 있던 낙관주의의 헛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인도의 핵실험 성공 후 뒤늦게 이같은 사실을 깨달은 미국은 핵규제 정책에 앞장서 각 국가의 평화적 목적의 핵활동마저 규제함으로써 또다른 부작용(*)을 낳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둘째로, 핵 이원화 정책은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에 따르는 안전성문제를 낙관한 결과, 안전상의 규제를 소홀히 하고 원자력의 건강과 환경에 대한 악영향을 과소평가함으로써 대규모 환경오염사고에 대처하지 못하였다.

국제원자력기구는 1962년에 방사선 보호 안전기준(Basic Safety Standards for Radiation)을 설정하여 방사선 근로자와 일반 대중의 방사선 노출 한도를 설정하고 이들에 대한 물리적, 의학적 감시체계와 방사선 보호 프로그램을 조직화하는 등 방사선이 건강과 환경에 미치는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안전기준 확립 당시 국제사회에는 근본적으로 원자력의 안전문제에 관한 위기의식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았고, 국제협력을 통해 건강과 환경에 대한 위험을 쉽게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낙관론이 팽배했을 뿐더러, 1970년대 초 오일쇼크 이래 급속히 늘어난 핵에너지의 공급과 수요를 예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안전기준에 의한 원자력 규제는 극히 미흡하였다.

또한 구조적으로 볼 때 건강 및 안전성 기준의 확보는 국제원자력기구의 단지 부차적인 목적일 뿐이고 기구 자체가 이에 대한 구속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국가들이 이 기준을 준수하도록 강제하지 못한다는 약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국제원자력기구는 핵시대 초기에 보다 강화된 안전기준을 확보하지 못하였으며, 이러한 상황은 1979년 쓰리마일 사고와 1986년 체르노빌 사고라는 대형 환경재해가 발생한 뒤부터 많이 개선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